다무라 하지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무라 하지메는 1924년 미에현에서 태어나,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1955년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노동상, 운수상, 통상산업상을 역임했으며, 1989년에는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 1996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14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노동대신 - 지바 사부로
지바 사부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석유 및 에너지 관련 기업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미야기현 지사와 중의원 의원, 노동대신을 역임하고 자유민주당 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다가 1979년 사망했다. - 일본의 노동대신 - 이시다 히로히데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시다 히로히데는 이시바시 단잔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자유민주당에서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여러 내각의 관방장관, 노동상, 운수상을 역임하며 노동 문제 해결에 힘썼고, 자민당의 위기를 경고하기도 했으나 소련 간첩 의혹 속에 정계를 은퇴했다. - 일본의 운수대신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 일본의 운수대신 -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군마현 출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행정 개혁, 국철 민영화 등을 추진하다가 2019년 사망했다. - 일본 중의원 의장 - 누카가 후쿠시로
누카가 후쿠시로는 산케이 신문 기자 출신으로 중의원 의원을 장기간 역임하며 방위청 장관, 경제재정정책 담당 대신, 재무대신 등 주요 요직을 거쳐 2023년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닛폰 카이기와의 관계 및 여러 스캔들 연루 등 논란도 있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 일본 중의원 의장 - 시데하라 기주로
시데하라 기주로는 국제 협조 외교를 펼친 외무대신이자 일본국 헌법 제정에 관여하고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으로, 헌법 9조 제안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다무라 하지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다무라 하지메 |
원어명 | 田村 元 (たむら はじめ) |
출생일 | 1924년 5월 9일 |
출생지 | 미에현 마쓰사카시 |
사망일 | 2014년 11월 1일 |
사망지 | 도쿄도 시부야구 |
정당 | 자유당 → 자유민주당 (오노파 → 미즈타파 → 다나카파 → 오부치파) |
학력 |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졸업 |
종교 | 신토 |
경력 | |
칭호/훈장 | 종2위 [[파일:JPN Toka-sho BAR.svg|40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마쓰사카시 명예 시민 법학사 (게이오기주쿠 대학, 1950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있음 |
자녀 | 3명 (3녀) |
친족 (정치인) | 다무라 다쓰시 (아버지) 다무라 겐지 (동생) 다무라 노리히사 (조카) 다무라 마코 (대조카) 모리야마 마사히토 (사위) |
의정 활동 | |
직책 | 제66대 일본 중의원 의장 |
임기 시작 | 1989년 6월 2일 |
임기 종료 | 1990년 1월 24일 |
천황 | 상황 (아키히토) |
직책 2 | 제46-47대 통상산업대신 |
내각 2 |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다케시타 내각 |
임기 시작 2 | 1986년 7월 22일 |
임기 종료 2 | 1988년 12월 27일 |
직책 3 | 제48대 운수대신 |
내각 3 | 후쿠다 다케오 내각 |
임기 시작 3 | 1976년 12월 24일 |
임기 종료 3 | 1977년 11월 28일 |
직책 4 | 제33대 노동대신 |
내각 4 |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
임기 시작 4 | 1972년 7월 7일 |
임기 종료 4 | 1972년 12월 22일 |
직책 5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5 | 미에현 제2구 |
당선 횟수 5 | 14회 |
임기 시작 5 | 1955년 2월 28일 |
임기 종료 5 | 1996년 9월 27일 |
기타 직책 1 | 자유민주당최고 고문 (총재: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고노 요헤이) |
임기 시작 6 | 1990년 |
임기 종료 6 | 1994년 |
기타 직책 2 | 제26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총재: 스즈키 젠코) |
임기 시작 7 | 1981년 |
임기 종료 7 | 1982년 |
웹사이트 |
2. 생애
1924년 5월 9일, 지금의 미에현 마쓰사카시에서 태어났다.[39] 아버지는 변호사 출신으로 미에현 의회 의원을 거쳐 1942년 익찬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다무라 데키시이다.[17][18] 구제 미에현립 우지야마다 중학교(미에현립 우지야마다 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39][1][5]
참의원 의원 마에다 미노루의 비서를 지내며 정치에 입문했다.[40] 1955년 총선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처음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40][1][3] 당시 30세로 최연소 당선자였다. 이후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2] 14선 의원을 지냈다.
대학 졸업 후 주가이로 공업,[39] 미에 교통에서 근무했으며, 중학교에서 임시 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참의원 의원 마에다 미노루의 비서가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40] 1953년 총선에 미에 2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5년 총선에서 다시 도전하여 당시 최연소인 30세의 나이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1][3]
초기에는 자유당 소속으로 오노 반보쿠 파벌에 속했다. 일본민주당과의 보수합동 과정에서는 막후에서 활동했으며, 자유민주당 창당 후에는 청년부장을 맡았다. 1960년 제2차 이케다 내각에서 건설정무차관, 1962년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개조)에서 노동정무차관을 지냈다.[39]
1964년 오노 반보쿠가 사망하자 파벌은 무라카미 이사무파와 후나다 나카파로 나뉘었고, 다무라는 무라카미파에 합류했다. 무라카미 사후에는 미즈타 미키오가 파벌을 이끌었다. 1972년 사토 에이사쿠 총재 사퇴 후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미즈타파를 이끌고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다. 그 결과 같은 해 7월 출범한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노동대신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입각했다.[1][5] 노동대신 재임 중에는 주5일근무제 도입과 정년 연장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1975년 6월, 같은 미즈타파 소속이었던 에사키 마스미와 함께 다나카 파벌로 옮겼다.[41][4] 같은 해 7월,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 내 한국 문제 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2]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기도 했다.[2] 1976년 7월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가 체포되자 "큰일났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12월, 후쿠다 다케오 내각이 출범하자 운수대신으로 입각했다.[39][1][5]
1977년 내 나리타 국제공항 개항을 공언한 후쿠다 다케오 총리의 뜻에 따라 지역 사회와의 갈등 조정에 힘썼다(나리타 공항 문제). 그 결과 1977년 11월 28일, 나리타 공항 개항일을 1978년 3월 30일로 결정하는 운수성 고시를 발표했다. 비록 후쿠다가 공언한 연내 개항에는 실패했지만, 오랜 난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개항 예정일 나흘 전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이 발생하여 실제 개항은 1978년 5월 20일로 연기되었다.)[42] 다무라는 고시 발표 당일 내각 개조로 후쿠나가 겐지에게 운수대신 자리를 넘겨주었다.[42] 1981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나카파 내에서 처음에는 니카이도 스스무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나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고, 파벌 내에서 독자적인 '다무라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82년 스즈키 젠코 총리가 사퇴 의사를 밝히자 후임 총재 선출을 둘러싸고 스즈키, 후쿠다, 니카이도 간의 협의가 난항을 겪었다. 당시 국회대책위원장이었던 다무라는 이 협의에 참여하여 '나카소네 총리, 후쿠다 총재'라는 총리·총재 분리안을 제안했으나, 나카소네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치러진 총재 선거 예비선거에서 나카소네가 압승했다. 훗날 다무라는 "후쿠다 총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가쿠 씨(다나카 가쿠에이)가 나카소네 씨에게 '절대로 받지 마라'고 말해서 나카소네 씨가 거절한 것이 내막"이라고 술회했다.[43]
다케시타 노보루가 파벌 내 파벌인 창정회를 결성하며 사실상 세력 장악에 나서자 이에 충격을 받은 다나카 가쿠에이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후 다케시타는 경세회를 창립하여 다나카파 의원 대부분을 흡수했다. 니카이도 스스무 등 일부는 니카이도 그룹을 결성해 다케시타에게 반발했지만, 다무라는 오쿠다 게이와 등과 함께 중간파를 형성했다가 결국 경세회에 합류했다.[44]
1986년 7월 출범한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으로 임명되어 다케시타 내각까지 유임했다.[39][6][7][9] 통산상 재임 중이던 1987년, 일본 기업의 대 소련 불법 수출 문제로 미국 의회에서 비판이 거세지자 미국을 방문하여 사과하기도 했다.[8] 1988년 12월 내각 개조 때 미쓰즈카 히로시에게 통산상 자리를 넘겨주었다.[9]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사임하게 되자 후임 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1989년 6월, 예산안 강행 처리 문제로 국회가 공전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라 겐자부로 중의원 의장과 다가야 신넨 부의장이 사임했다. 다무라는 그 후임으로 제66대 일본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10] 그러나 소비세 도입 문제를 둘러싼 정국 혼란으로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약 7개월 만인 1990년 1월 24일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 의장에는 사쿠라우치 요시오가 선출되었다.[10] 이후 자민당 최고 고문을 맡았다. 1994년에는 사형 폐지를 추진하는 의원 연맹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소선거구제 도입에 반대하며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나는 구 미에 2구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다음 선거에서 (지금까지의 지지 기반을) 나눌 수는 없다"고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그의 지역구는 조카인 다무라 노리히사가 물려받았다. 다무라는 중의원 선거에서 14회 연속 당선되었으며, 중선거구제 하에서 13회 연속 최고 득표 당선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미키 다케오와 같은 기록이다). 2004년 마쓰사카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전의원회(全議員会)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다.
2014년 11월 1일, 도쿄도 시부야구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45][46][11][12] 향년 90세. 사후 종2위에 추서되었다.[47][27]
다무라는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1] 남동생 다무라 겐지는 일본토건 명예회장 등을 지낸 기업인이다. 조카 다무라 노리히사는 자민당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서 후생노동대신을 역임했다. 장녀의 남편은 자민당 중의원 의원이자 문부과학대신을 지낸 모리야마 마사히토이다.
친한 동료들 사이에서는 '다무겐'(タムゲン)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29] 취미는 독서였으며, 종교는 신토였다.[13][14]
3. 정치 활동
정치 활동 초기에는 오노 반보쿠 파벌에 속했으며,[40] 오노 사후에는 무라카미 파, 미즈타 파를 거쳐 1975년 다나카 파로 옮겼다.[41] 다나카파 내에서 영향력을 키웠으며, 다케시타 노보루가 경세회를 결성할 때 합류했다.[44] 당내에서는 국회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4]
노동대신, 운수대신, 통상산업대신 등 여러 내각에서 주요 각료직을 역임했으며,[1][5][6][7][9] 1989년부터 1990년까지는 제66대 일본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10]
1975년에는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 내 한국 문제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기도 했다.[2] 1994년에는 사형 폐지를 추진하는 의원 연맹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정계의 거물"이라는 별명을 가졌던[11] 다무라는 1996년 소선거구제 도입에 반대하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했다.[11] 그의 지역구 기반은 조카인 다무라 노리히사가 이어받았다.
3. 1. 초기 정치 활동 (1955년 ~ 1972년)
참의원 의원 마에다 미노루의 비서가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40] 1953년 제26회 총선에 처음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55년 제27회 총선에서 미에현 제2구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40]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로, 최연소 당선 기록이었다.
초기에는 오노 반보쿠 파벌에 속했으며,[40]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 과정에서는 주로 막후에서 활동했다. 자유민주당 창당 후에는 청년부장을 맡았다.[40] 1960년에는 제2차 이케다 내각에서 건설정무차관을, 1962년에는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개조)에서 노동정무차관을 지냈다.[39]
1964년 오노 반보쿠가 사망한 후, 그의 파벌은 무라카미 이사무 파와 후나다 나카 파로 분열되었는데, 다무라는 무라카미 파에 합류했다. 이후 무라카미가 사망하자 미즈타 미키오가 파벌을 이끌었다.[40] 1972년 사토 에이사쿠 총재가 물러나면서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다.[40] 그 결과, 같은 해 7월 출범한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각료가 되었다.[40][1][5] 노동상 재임 기간 동안에는 주휴 2일제 도입과 정년 연장 등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 힘썼다.[40]
3. 2. 각료 경력 (1972년 ~ 1988년)
1972년 7월,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이 출범하자 노동대신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각료가 되었다.[39] 노동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주휴 2일제 도입과 정년 연장 같은 노동 환경 개선 정책을 추진했다.
1975년 6월에는 같은 파벌 소속이었던 에사키 마스미와 함께 다나카파로 소속을 옮겼다.[41] 이후 1976년 12월에 출범한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는 운수대신으로 임명되었다.[39] 운수상 시절에는 후쿠다 다케오 총리가 1977년 내 개항을 공언했던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사회와의 조정을 맡았다. 비록 후쿠다 총리가 약속한 연내 개항은 이루지 못했지만, 1977년 11월 28일에 공항 개항일을 다음 해 3월 30일로 정하는 운수성 고시를 발표하며 오랜 현안 해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개항 4일 전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이 발생하여 실제 개항은 5월 20일로 연기되었다. 다무라는 개항일 고시 발표 당일 이루어진 개각으로 후쿠나가 겐지에게 운수상 자리를 넘겨주고 퇴임했다.[42]
1981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당내 활동을 이어갔다. 1982년 스즈키 젠코 총리가 사임을 발표하자, 후계자를 정하기 위한 스즈키, 후쿠다, 니카이도 간의 회담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다무라는 총리는 나카소네, 당 총재는 후쿠다로 하는 이른바 '총총 분리' 안을 제안했으나, 나카소네가 이를 거절했다. 다무라는 훗날 나카소네가 거절한 배경에는 후쿠다의 총재 취임을 원치 않았던 다나카의 의중이 있었다고 밝혔다.[43]
1986년 7월에는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으로 임명되어 다케시타 내각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39][6][7][9] 이 시기 미일 무역 마찰이 심화되면서, 일본 제조업체의 수출 규정 위반 문제에 대해 미국 측에 사과하기도 했다.[8] 1988년 12월 개각 때 미쓰즈카 히로시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통상산업대신에서 물러났다.[9]
3. 3. 중의원 의장 및 정계 은퇴 (1989년 ~ 1996년)
1989년 6월, 예산안 표결 강행 문제로 국회가 공전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라 겐자부로 의장과 다가야 신넨 부의장이 사임했다. 그 후임으로 다무라가 제66대 일본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0]
그러나 소비세 도입을 둘러싼 논란으로 의회가 해산되면서, 1990년 1월 24일 사쿠라우치 요시오가 후임 의장으로 임명되어 다무라는 약 7개월 만에 의장직에서 물러났다.[10] 이후 자민당 최고 고문이 되었다.
1994년에는 사형 폐지를 추진하는 의원 연맹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96년 제41회 총선을 앞두고, 소선거구제 도입에 반대하며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나는 미에현 제2구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아 왔다. 다음 선거에서 (지금까지의 지지자를 절반으로) 나누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그의 지지 기반은 조카인 다무라 노리히사가 물려받았다. "정계의 거물"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다무라는 이렇게 정계를 떠났다.[11]
4. 외교 활동
1975년 7월, 자유민주당의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2]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다케시타 노보루가 이끄는 내각에서 1986년부터 1988년까지 통상산업대신을 역임했는데,[6][7][9] 재임 중 일본 제조업체의 수출 규정 위반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에 사과하기도 했다.[8]
4. 1. 대북 관계
1975년 기준으로 다무라는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 내의 한국 문제 위원회 위원장이었다.[2] 그해 7월, 그는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 김일성을 만났다.[2]4. 2. 대한 관계
1975년 기준으로 다무라는 자유민주당 내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의 한국 문제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2] 같은 해 7월, 그는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에서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과 회담했다.[2]5. 평가
정계에서 "정계의 거물"이라는 별명을 가졌으며[11],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는 "타무겐"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29]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 당시, 오노 반보쿠의 지시로 미키 부키치 등과 교섭에 나섰다. 양당 대표가 비밀 회동을 할 때 언론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인접한 두 요정 사이의 담벼락을 "나중에 제대로 변상하겠다"고 말하며 직접 톱으로 부숴 비밀 통로를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언론 모르게 양당 대표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30]
운수대신 시절에는 나리타 국제공항 개항 문제 해결에 힘썼다. 당시 치바항과 나리타 공항을 잇는 항공 연료 파이프라인 부설을 반대하던 아라키 가즈나리 치바 시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는 시장의 고민을 경청하고 장기적인 치바시 발전을 위한 협력을 약속하며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다무라는 이후 인터뷰에서 "나리타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국가 권력을 내세워 밀어붙여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역 사회와 해당 프로젝트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철저히 논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29] 그러나 그는 내각 개편으로 운수대신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예상하며 "1년 임기의 대신으로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일하기 어렵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31]
미에현 도바시의 가미시마와 토시 섬에서는 주민들이 그의 공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돈을 모아 그의 동상을 세웠다.
다나카 가쿠에이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지 않은 세 명의 정치인(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다무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다나카 파벌 간부로부터 "(다나카에게) 경계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33]
취미는 독서였으며[13][14], 종교는 신도였다.[13][14]
6. 가족 관계
아버지 다무라 미노루는 변호사 출신으로 미에현 의회 의원을 지낸 뒤 익찬의회에서 초선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48][49][17][18] 다무라 하지메는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1] 그의 조카인 다무라 노리히사는 9선 출신의 현역 중의원 의원이며,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서 후생노동대신을 역임했다.[1] 사위인 모리야마 마사히토 역시 국가공무원을 퇴직한 뒤 5선 출신의 현역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48][49]
7. 역대 선거 기록
wikitext
연도 | 선거 종류 | 회차 | 직위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선거 제도 |
---|---|---|---|---|---|---|---|---|---|---|
1953년 | 총선거 | 26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무소속 | 22,630 | 8.6 | 7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1955년 | 총선거 | 27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당 | 36,818 | 13.3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8년 | 총선거 | 28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65,758 | 22.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0년 | 총선거 | 29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7,461 | 32.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3년 | 총선거 | 30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5,340 | 25.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7년 | 총선거 | 31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5,308 | 24.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9년 | 총선거 | 32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3,953 | 26.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2년 | 총선거 | 33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12,343 | 37.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6년 | 총선거 | 34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91,022 | 30.0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9년 | 총선거 | 35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05,850 | 34.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0년 | 총선거 | 36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02,876 | 32.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3년 | 총선거 | 37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9,584 | 25.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6년 | 총선거 | 38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04,966 | 32.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0년 | 총선거 | 39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1,446 | 23.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3년 | 총선거 | 40회 | 중의원 의원 | 미에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91,200 | 27.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참조
[1]
웹사이트
A Perspective of Japanese/Canadian Economic Ties and Japan's Overseas Economic Policy
http://speeches.empi[...]
2013-10-14
[2]
논문
Japanese-North Korean Relations in the 1970s: From a Linkage. Politics Perspective
1980
[3]
웹사이트
Norihisa Tamura
http://www.kantei.go[...]
2013-10-14
[4]
서적
The Core of Japanese Democracy Latent Interparty Politics
https://doi.org/10.1[...]
Palgrave Macmillan
[5]
웹사이트
Kakuei Tanaka. Chapter 5. Getting Rid of Kaifu
http://www.rcrinc.co[...]
[6]
뉴스
Japan's New Cabinet Gets Old Face
https://www.nytimes.[...]
2013-10-14
[7]
뉴스
Japan's longest-serving trade minister
http://news.xinhuane[...]
2013-10-14
[8]
서적
All Her Paths Are Peace: Women Pioneers in Peacemaking
Kumarian Press
[9]
뉴스
Takeshita Shuffles Cabinet but Retains Key Ministers
https://www.latimes.[...]
2013-10-14
[10]
웹사이트
The National Diet of Japan
http://www.shugiin.g[...]
2013-10-14
[11]
뉴스
Former Lower House speaker Tamura dies at 90
http://www.japantime[...]
2015-01-22
[12]
뉴스
元衆院議長の田村元氏死去 当選14回「政界仕掛け人
http://www.asahi.com[...]
2015-01-22
[13]
문서
『人事興信録 第25版 下』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24-02-11
[14]
서적
『人事興信録 第38版 下』
[15]
웹사이트
田村 元とは
https://kotobank.jp/[...]
2022-03-31
[16]
뉴스
田村元氏が死去 元衆議院議長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4-11-04
[17]
문서
『人事興信録 第14版 下』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18-09-06
[18]
문서
『翼賛議員銘鑑』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18-09-06
[19]
서적
『政治家人名事典』
[20]
서적
日本政治史に残る三重県選出国会議員
[21]
서적
田中角栄研究 全記録(上)
講談社文庫
1982-08-15
[22]
서적
成田空港365日
崙書房
[23]
뉴스
田村元衆院議長死去 政変で光った策士「タムゲン」
http://www.tokyo-np.[...]
東京新聞
[24]
뉴스
田中角栄に反旗、竹下派旗揚げ 「政界のドン」金丸信(5)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1-08-28
[25]
뉴스
元衆院議長の田村元氏死去 当選14回「政界仕掛け人」
https://web.archive.[...]
朝日新聞
2014-11-04
[26]
뉴스
「タムゲン」の愛称…元衆院議長の田村元氏死去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27]
뉴스
故田村元・元衆院議長に従二位
http://jp.wsj.com/ar[...]
ウォール・ストリート・ジャーナル ジャパン
2014-11-18
[28]
웹사이트
平成26年11月18日 本会議議事録
https://www.shugiin.[...]
[29]
서적
はるかなる三里塚
講談社
1978
[30]
문서
政治家の正体
[31]
서적
心は野にありて―回想録
朝日新聞社出版局
[32]
간행물
正論
[33]
뉴스
読売新聞
[34]
뉴스
94年秋の叙勲 勲三等以上および在外邦人、外国人の受章者
読売新聞
[35]
문서
『人事興信録 第25版 下』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24-02-11
[36]
서적
人事興信録 第38版 下
[37]
웹사이트
田村 元とは
http://kotobank.jp/w[...]
2022-03-31
[38]
뉴스
田村元氏が死去 元衆議院議長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4-11-04
[39]
서적
政治家人名事典
[40]
서적
日本政治史に残る三重県選出国会議員
1985
[41]
서적
田中角栄研究 全記録(上)
講談社文庫
1982-08-15
[42]
서적
成田空港365日
崙書房
2000
[43]
뉴스
田村元衆院議長死去 政変で光った策士「タムゲン」
http://www.tokyo-np.[...]
東京新聞
2014-11-04
[44]
뉴스
田中角栄に反旗、竹下派旗揚げ 「政界のドン」金丸信(5)
http://www.nikkei.co[...]
日本経済新聞
2011-08-28
[45]
웹사이트
元衆院議長の田村元氏死去 当選14回「政界仕掛け人」
https://web.archive.[...]
2014-11-04
[46]
웹사이트
「タムゲン」の愛称…元衆院議長の田村元氏死去
https://web.archive.[...]
2014-11-04
[47]
웹사이트
故田村元・元衆院議長に従二位
http://jp.wsj.com/ar[...]
2014-11-18
[48]
간행물
人事興信録 第14版 下
"{{NDLDC|1704455/86}[...]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18-09-06
[49]
간행물
翼賛議員銘鑑
"{{NDLDC|1439721/150[...]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18-09-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